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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규수로 보더라도 그 얼굴이나 마음이나 가정 교훈을 받은 점으로나 나는 만족하였다. 이 약혼에 대하여 부모님이 기뻐하심은 말할 것도 없었다. 외아들을 장가들인다는 것만도 기쁜 일이거늘, 하물며 이름 높은 학자요, 양반의 집과 혼인을 하게 된 것을 더욱 영광으로 생각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비록 없는 살림이라도 혼인 준비에 두 집이 다 바빴다. 
 아직 성례 전이지마는 고 선생 댁에서는 나를 사위로 보는 모양이어서, 혹시 선생 댁에서 저녁을 먹게 되면 그 처녀가 상을 들고 나오고, 6, 7세 되는 그의 어린 동생은 나를 아재라고까지 부르고 반가워하였다. 이를테면 내 장인 장모인 원명 부처의 장례도 내가 조력하여서 지냈다. 
 나는 선생께 이번 여행에서 본 바를 보고하였다. 두만강, 압록강 건너편의 땅이 비옥하고, 또 지세도 요새로 되어 있어 족히 동포를 이식하고 양병도 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곳 인심이 순후한 것이며, 또 서옥생의 아들과 결의(結義)형제가 되었다는 것 등을 낱낱이 아뢰었다. 
 때는 마침 김홍집 일파가 일본의 후원으로 우리나라 정권을 잡아서 ‘신장정’이라는 법령을 발하여 급진적으로 모든 제도를 개혁하던 무렵으로서, 그 새 법의 하나로 나온 것이 단발령이었다. 대군주 폐하라고 부르는 상감께서 먼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으시고는 관리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깎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 단발령이 팔도에 내렸으나 백성들이 응종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서울을 비롯하여 감영, 병영 같은 큰 도회지에서는 목목이 군사가 지켜져서 행인을 막 붙잡고 상투를 잘랐다. 이것을 늑삭(억지로 깎는다는 뜻)이라 하여 늑삭을 당한 사람은 큰일이나 난 것처럼 통곡을 하였다. 
 이 단발령은 크게 민원을 일으켜서 어떤 선비는 도끼를 메고,  "이 목을 자를지언정 이 머리는 깎지 못하리라"  하는 뜻으로 상소를 올렸다. '차라리 지하에 목 없는 귀신이 될지언정, 살아서 머리 깎은 사람은 아니 되리라'는 글이 마치 격서 모양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파하여서 민심을 선동하였다. 이처럼 단발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이유가 다만 유교의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孝之始也) 내 온몸을 부모로부터 받았으니 감히 이를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에서 나온 것만이 아니요, 이것은 일본이 시키는 것이라는 반감에서 온 것이었다.  군대와 경찰관은 이미 단발이 끝나고 문관도 공리에 이르기까지 실시하는 중이었다. 
 나는 고 선생께 안 진사와 상의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진언하였다. 이를테면 단발 반대의 의병이었고, 단발 반대를 곧 일본 배척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회의는 열렸으나 안 진사의 뜻은 우리와 달랐다. 이길 가망이 없는 일을 일으킨다면 실패할 것밖에 없으니 천주교나 믿고 있다가 시기를 보아서 일어나자는 것이 안 진사의 의사였다. 그는 머리를 깎이게 된다면 깎아도 좋다고까지 말하였다.  안 진사의 말에 고 선생은 두말하지 않고, "진사, 오늘부터 자네와 끊네."하고 자리를 차고 일어나 나갔다. 끊는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선비가 절교를 선언하는 말이다. 
 이 광경을 보고 나도 안 진사에 대하여 섭섭한 마음이 났다. 안 진사 같은 인격으로서, 되었거나 못 되었거나 제 나라에서 일어난 동학은 목숨을 내어놓고 토벌까지 하면서 서양 오랑캐의 천주학을 한다는 것은 괴이한 일이거니와, 그는 그렇다 하더라도 목을 잘릴지언정 머리를 깎지 못하겠다는 생각은커녕 단발할 생각까지 가졌다는 것은 대의에 어긋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안 진사의 태도에 실망한 고 선생과 나는 얼른 내 혼인이나 하고 청계동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나는 금주 서옥생의 아들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천만 염외에 불행한 일이 또 하나 생겼다. 어느 날 아침 일찍이 고 선생이 나를 찾아오셔서 대단히 낙심한 얼굴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제 내가 사랑에 앉았노라니 웬 김가라는 자가 찾아와서 '당신이 고 아무개요?' 하기로 그렇다 한즉, 그 자가 내 앞에 다가와 칼을 내어놓으며 하는 말이, '들으니 당신이 손녀를 김창수에게 허혼을 하였다 하니, 그러면 첩으로 준다면 모르되 정실로는 아니 되리다. 김창수는 벌써 내 딸과 약혼한 지가 오래요.' 그러기로 나는, '김창수가 정혼한 데가 없는 줄 알고 내 손녀를 허한 것이지, 만일 약혼한 데가 있다면야 그러할 리가 있는가. 내가 김창수를 만나서 해결할 터이니 돌아가라'고 해서 돌려보내기는 했으나 내 집안에서는 모두 큰 소동이 났네." 
 나는 이 말을 듣고 모든 일이 재미없이 된 줄을 알았다. 그래서 선생께 뚝 잘라 이렇게 여쭈었다. 
 "제가 선생님을 사모하옵기는 높으신 가르침을 받잡고지 함이옵지 손서가 되는 것이 본의는 아니오니 혼인하고 못 하는 것에 무슨 큰 상관이 있사오리까. 저는 혼인은 단념하고 사제의 의리로만 평생에 선생님을 받들겠습니다." 
 내 말을 듣고 고 선생은 눈물을 흘리시고, 나를 얻어 손서를 삼으려다가 이 괴변이 났다는 것을 자탄하시고, 끝으로,  "그렇다면 혼인 일사는 다시 거론하지 마세. 그런데 지금 관리의 단발이 끝나고는 백성에게도 단발을 실시할 모양이니 시급히 피신하여 단발화를 면하게. 나는 단발화가 미치면 죽기로 작정했네." 하셨다. 
 나는 마음을 지어먹고 고 선생의 손녀와 혼인을 아니하여도 좋다고 장담은 하였으나 내심으로는 여간 섭섭하지 아니하였다. 나는 그 처녀를 깊이 사랑하고 정이 들었던 것이었다. 
 이 혼사에 훼사를 놓은 김가라는 사람은 함경도 정평에 본적을 둔 김치경이다. 10여 년 전에 아버지께서 술집에서 그를 만나 술을 같이 자시다가 김에게 8, 9세 되는 딸이 있단 말을 들으시고 취담으로, "내 아들과 혼사하자"하여 서로 언약을 하고, 그 후에 아버지는 그 언약을 지키셔서 내 사주도 보내시고 또 그 계집애를 가끔 우리 집에 데려다 두기도 하셨는데, 서당 동무들이 '함지박 장수 사위'라고 나를 놀리는 것도 싫었고, 또 한 번은 얼음판에 핑구를 돌리고 있는데 그 계집애가 따라와서 제게도 핑구를 하나 만들어달라고 나를 조르는 것이 싫고 미워서,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떼를 써서 그 애를 제집으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그러나 약혼을 깨뜨린 것은 아니었다. 
 그 후 여러 해를 지내어서 갑오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아들딸을 혼인이나 시켜야 한다고 어린 것들까지도 부랴부랴 성례를 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그때 동학 접주로 동분서주하던 내가 하루는 여행을 하고 돌아오니 집에서는 그 여자와 나와 성례를 한다고 술과 떡을 마련하고 모든 혼구를 다 차려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사코 싫다고 버티어서 마침내 김치경도 도리어 무방하게 생각하여 아주 이 혼인은 파혼이 되고, 김은 그 딸을 돈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정혼까지 한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고씨 집에 장가든다는 소문을 듣고 김은 돈이라도 좀 얻어먹을 양으로 고 선생 댁에 와서 야료를 한 것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크게 분노하여 김치경을 찾아가서 김과 한바탕 싸우셨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서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내 혼인 문제는 불행한 끝을 맺고, 고 선생도 청계동에 더 계실 뜻이 없어 해주 비동의 고향으로 돌아가시고, 나는 금주 서씨의 집으로 가느라고 역시 청계동을 떠났다. 이리하여서 내 방랑의 길은 다시 계속되었다. 
 평양 감영에 다다르니 관찰사 이하로 관리 전부가 벌써 단발을 하였고, 이제는 길목을 막고 행인을 막 붙들어서 상투를 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머리를 아니 깎이려고 슬몃슬몃 평양을 빠져나와 촌으로 산읍으로 피난을 가고, 백성이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찼다. 이것을 보고 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하여서라도 왜의 손에 노는 이 나쁜 정부를 들어 엎어야 한다고 주먹을 불끈불끈 쥐었다. 
 안주 병영에 도착하니 게시판에 단발을 정지하라는 영이 붙어있었다. 임금은 개혁파가 싫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하시고, 수구파들은 러시아 세력에 등을 대고 총리대신 김홍집을 때려죽이고, 개혁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놓은 것이었다. 이로부터 우리나라에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다툼이 시작되고, 친아파와 친일파의 갈등이 벌어지게 되었다. 
 나는 한성 정국의 변동으로 심기가 일전하였다. 구태여 외국으로 갈 것이 무엇이냐, 삼남에서는 곳곳에 의병이 일어난다고 하니 본국에 머물러 시세를 관망하여서 새로 거취를 정하기로 하고, 길을 돌려 용강을 거쳐서 안악으로 가기로 하였다. 
 나는 치하포 나룻배에 올랐다. 때는 병신년 2월 하순이라, 대동강 하류인 이 물길에는 얼음산이 수없이 흘러내렸다. 남녀 15, 6명을 태운 우리 나룻배는 얼음산에 싸여서 행동의 자유를 잃고 진남포 아래까지 밀려 내려갔다가 조수를 따라서 다시 상류로 오르락 내리락하게 되었다. 선객은 말할 것도 없고 선부들까지도 이제는 죽었다고 울고불고하였다. 해마다 이때 이 길목에서는 이런 참변이 생기는 일이 많았는데, 우리가 지금 그것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배에는 양식이 없으니 비록 파선하기를 면하더라도 사람들이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것이다. 
 다행히 나귀 한 마리가 있으니 이 모양으로 여러 날이 가게 될 경우에는 잔인하나마 잡아먹기로 하고, 한갓 울고만 있어도 쓸데없으니 선객들도 선부들과 함께 힘을 써보자고 내가 발론하였다. 여럿이 힘을 합하여서 얼음산을 떠밀어 보자는 것이다. 
 나는 몸을 날려 성큼 얼음산에 뛰어 올라서 형세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큰 산을 의지하여 작은 산을 떠밀고, 이러한 방법을 반복하여서 간신히 한 줄기 살 길을 찾았다. 이리하여 치하포에서 5리쯤 떨어진 강 언덕에 내리니, 강 건너 서쪽 산에 지는 달이 아직 빛을 남기고 있었다. 찬바람 속에 밤길을 걸어서 치하포 배 주인 집에 드니 풍랑으로 뱃길이 막혀서 묵는 손님이 삼간방에 가득히 누워서 코를 골고 있었다. 
 우리 일행도 그 틈에 끼어 막 잠이 들려 할 즈음에 벌써 먼저 들었던 사람들이 일어나서 오늘 일기가 좋으니 새벽물에 배를 건너게 해달라고 야단들이다. 이윽고 아랫방에서부터 벌써 밥상이 들기 시작하였다. 
 나도 할 수 없이 일어나 앉아서 내 상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방 안을 휘 둘러보았다. 가운뎃 방에 단발한 사람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가 어떤 행객과 인사하는 것을 들으니 그의 성은 정씨요, 장연에 산다고 한다. 장연에서는 일찍 단발령이 실시되어서 민간인들도 머리를 깎은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 말씨가 장연 사투리가 아니요, 서울말이었다. 조선말이 썩 능숙하지마는 내 눈에는 분명 왜놈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의 흰 두루마기 밑으로 군도집이 보였다. 어디로 가느냐 한즉 그는 진남포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보통으로 장사나 공업을 하는 일인 같으면 이렇게 변복, 변성명을 할 까닭이 없으니 이는 필시 국모를 죽인 삼포오루(三浦梧樓:미우라 고로) 놈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 저도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국가와 민족에 독균이 되기는 분명한 일이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하나의 수치를 씻어 보리라고 나는 결심하였다. 그리고 나는 내 힘과 환경을 헤아려 보았다. 삼간방 40여명 손님 중에 그놈의 패가 몇이나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열일고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총각 하나가 그의 곁에서 수종을 들고 있었다. 
 나는 궁리하였다. 저놈은 둘이요, 또 칼이 있고, 나는 혼자요, 또 적수공권이다. 게다가 내가 저놈에게 손을 대면 필시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말릴 것이요, 사람들이 나를 붙잡고 있는 틈을 타서 저놈의 칼은 필시 내 목에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망설일 때에 내 가슴은 울렁거리고 심신이 혼란하여 진정할 수가 없어서 심히 고민하였다. 그때에 문득 고 선생의 교훈 중에,  '득수반지부족기 현애철수장부아(得樹攀枝不足奇 懸崖撤手丈夫兒) 나뭇가지 부여잡고 오르는 것이 기이할 일이 아니니, 절벽에서 손을 놓아야 대장부로다.'라는 글이 생각났다. 벼랑을 잡은 손을 탁 놓아라. 그것이 대장부다.
 나는 가슴속에 한 줄기 광명이 비침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문자답하였다. 
 ‘저 왜놈을 죽이는 것이 옳으냐?’ 
 ‘옳다.’ 
 ‘네가 어려서부터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느냐?’
 ‘그렇다.’
 ‘의를 보았거든 할 것이요, 일의 성불성을 교계하고 망설이는 것은 몸을 좋아하고 이름을 좋아하는 자의 일이 아니냐.’
 ‘그렇다. 나는 의를 위하는 자요, 몸이나 이름을 위하는 자가 아니다.’
 이렇게 자문자답하고 나니 내 마음의 바다에 바람은 잦고 물결은 고요하여 모든 계교가 저절로 솟아올랐다. 나는 40명 객과 수백 명 동민을 눈에 안 보이는 줄로 꽁꽁 동여 수족을 못 놀리게 하여놓고, 다음에는 저 왜놈에게 티끌만한 의심도 일으키지 말아서 안심하고 있게 하여 놓고, 나 한 사람만이 자유자재로 연극을 할 방법을 취하기로 하였다. 
 다른 손님들이 자던 입에 새벽 밥상을 받아 아직 삼분지 일도 밥을 먹기 전에 그보다 나중 상을 받은 나는 네댓 술에 한 그릇 밥을 다 먹고 일어나서 주인을 불러 내가 오늘 해 전으로 700리 길을 걸어야 하겠으니, 밥 일곱 상을 더 차려오라고 하였다. 37, 8세 됨직한 골격이 준수한 주인은 내 말에 대답은 아니 하고 방 안에 있는 다른 손님들을 둘러보며,  "젊은 사람이 불쌍하다. 미친놈이로군."하고 들어가 버렸다. 
 나는 목침을 베고 한편에 드러누워서 방 안의 무리와 그 왜놈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어떤 유식한 듯한 청년은 주인의 말을 받아 나를 미친놈이라고 하고, 또 어떤 담뱃대를 붙여 문 노인은 그 젊은 사람을 책하는 말로, "여보게, 말을 함부로 말게. 지금인들 이인(異人)이 없으란 법이 있겠나. 이러한 말세에 이인이 나는 법일세."하고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그 젊은 사람도 노인의 눈을 따라 나를 흘끗 보더니 입을 삐죽하고 비웃는 어조로, "이인이 없을 리야 없겠요마는, 아 저 사람 생긴 꼴을 보세요. 무슨 이인이 저렇겠어요."하고 내게 들려라 하고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그 왜는 별로 내게 주목하는 기색도 없이 식사를 마치고는 밖으로 나가 문설주에 몸을 기대고 서서 방 안을 들여다보면서 총각이 밥값을 치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는 때가 왔다 하고 서서히 일어나 '이놈!' 소리를 치면서 발길로 그 왜놈의 복장을 차니 그는 한 길이나 거진 되는 계하에 나가떨어졌다. 나는 나는 듯이 쫓아 내려가 그놈의 모가지를 밟았다. 삼간 방문 네 짝이 일제히 열리며 그리로 사람들의 모가지가 쑥쑥 내밀어졌다. 나는 몰려나오는 무리를 향하여, "누구나 이 왜놈을 위하여 감히 내게 범접하는 놈은 모조리 죽일 테니 그리 알아라!"하고 선언하였다.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발에 채이고 눌렸던 왜놈이 몸을 빼쳐서 칼을 빼어 번쩍거리며 내게로 덤비었다. 나는 내 면상에 떨어지는 그의 칼날을 피하면서 발길을 들어 그의 옆구리를 차서 거꾸러뜨리고 칼을 잡은 손목을 힘껏 밟은즉 칼이 저절로 언 땅에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나는 그 칼을 들어 왜놈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를 쳤다. 2월 추운 새벽이라 빙판이 진 땅 위에 피가 샘솟듯 흘렀다. 
 나는 손으로 그 피를 움켜 마시고, 또 왜의 피를 내 낯에 바르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검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면서, 아까 왜놈을 위하여 내게 범하려던 놈이 누구냐 하고 호령하였다. 미처 도망하지 못한 행객들은 모조리 방바닥에 넙적 엎드려, 어떤 이는, "장군님, 살려주십시오. 나는 그놈이 왜놈인 줄 모르고 예사 사람으로 알고 말리려고 나갔던 것입니다."하고, 또 어떤 이는, "나는 어저께 바다에서 장군님과 함께 고생하던 사람입니다. 왜놈과 같이 온 사람이 아닙니다."하고 모두 겁이 나서 벌벌 떨고 있는 사람들 중에 아까 나를 미친놈이라고 비웃던 청년을 책망하던 노인만이 가슴을 떡 내밀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장군님, 아직 지각없는 젊은 것들이니 용서하십시오." 하였다. 
 이 때에 주인 이 선달 화보가 감히 방 안에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문 밖에 꿇어앉아서, "소인이 눈깔만 있고 눈동자가 없사와 누구신 줄을 몰라뵈옵고 장군님을 멸시하였사오니 죽어도 한이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나 그 왜놈과는 아무 관계도 없삽고, 다만 밥을 팔아먹은 죄밖에 없사옵니다. 아까 장군님을 능욕한 죄로 그저 죽여줍소서." 하고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내가 주인에게 그 왜가 누구냐고 물어서 얻은 바에 의하면, 그 왜는 황주에서 조선 배 하나를 얻어 타고 진남포로 가는 길이라 했다. 나는 주인에게 명하여 그 배의 선원을 부르고 배에 있는 그 왜의 소지품을 조속히 들이라 하였다. 이윽고 선원들이 그 왜의 물건을 가지고 와서 저희들은 다만 선가를 받고 그 왜를 태운 죄밖에 없으니 살려달라고 빌었다. 
 소지품에 의하여 조사한 즉 그 왜는 육군 중위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란 자요, 엽전 600냥이 짐에 들어있었다. 나는 그 돈에서 선인들의 선가를 떼어주고, 나머지는 이 동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라고 분부하였다. 주인 이 선달이 곧 동장이었다. 시체의 처치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분부하였다. 왜놈은 다만 우리나라와 국민의 원수가 될 뿐만 아니라 물속에 있는 어별들에게도 원수인 즉, 이 왜의 시체를 강에 넣어 고기들로 하여금 나라의 원수의 살을 먹게 하라 하였다. 
 주인 이 선달은 매우 능간하게 일변 세수 제구를 들이고, 일변 밥 일곱 그릇을 한 상에 놓고 다른 상 하나에는 국수와 찬수를 놓아서 들였다. 나는 세수를 하여 얼굴과 손에 묻은 피를 씻고 밥상을 당기어서 먹기 시작하였다. 밥 한 그릇을 다 먹은 지가 10분밖에 안 되었지마는 과격한 운동을 한 탓으로 한두 그릇은 더 먹을 법 하여도 일곱 그릇을 다 먹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까 한 말을 거짓말로 돌리기도 창피하여서, 양푼을 하나 올리라 하여 양푼에 밥과 식찬을 한데 쏟아 비비고 숟가락을 하나 더 청하여 두 숟가락을 포개어 가지고 한 숟가락 밥이 사발통만하도록 보기 좋게 큼직큼직하게 떠서 두어 그릇 턱이나 먹은 뒤에 숟가락을 던지고 혼잣말로, "오늘은 먹고 싶은 왜놈의 피를 많이 먹었더니 밥이 아니 들어가는고." 하고 시치미를 뗐다. 
 식후에 토전의 시체와 그의 돈 처치를 다 분별하고 나서, 주인 이화보를 불러 지필을 대령하라 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를 죽였노라'하는 뜻의 포고문을 한 장 쓰고, 그 끝에 해주 백운방 기동 김창수'라고 서명까지 하여 큰길가 벽상에 붙이게 하고, 동장인 이화보더러 이 사실을 안악 군수에게 보고하라고 명한 후에 유유히 그곳을 떠났다. 
 신천읍에 오니 이 날이 마침 장날이라 장꾼들이 많이 모였는데, 이곳저곳에서 치하포를 이야기하는 것이 들렸다. 어떤 장사가 나타나서 한 주먹으로 일인을 때려죽였다는 둥, 나룻배가 빙산에 끼인 것을 그 장사가 강에 뛰어들어서 손으로 얼음을 밀어서 그 배에 탄 사람을 살렸다는 둥, 밥 일곱 그릇을 눈 깜짝할 새에 다 먹더라는 둥 말들을 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지난 일을 낱낱이 아뢰었더니, 부모님은 날더러 어디로 피하라고 하셨으나, 나는 나라를 위하여서 정정당당한 일을 한 것이니 비겁하게 피하기를 원하지 않을뿐더러, 만일 내가 잡혀가 목이 떨어지더라도 이로써 만민에게 교훈을 준다 하면 죽어도 영광이라 하여 집에서 잡으러 오기를 기다렸다. 
 그로부터 석 달이나 지나서 병신년 5월 열하룻날 새벽에 내가 아직 자리에 누워 일어나기도 전에 어머니께서 사립문을 여시고, "얘, 우리 집을 앞뒤로 보지 못하던 사람들이 둘러싸누나." 하시는 말씀이 끝나자 철편과 철퇴를 든 수십 명이, "네가 김창수냐?" 하고 덤벼들었다. 
 나는, "그렇다. 나는 김창수여니와 그대들은 무슨 사람이관대 요란하게 남의 집에 들어오느냐?" 한즉 그제야 그 중의 한 사람이 '내부훈령등인(內部訓令等因)'이라 한 체포장을 내어 보이고 나를 묶어 앞세웠다. 순검과 사령이 도합 30여명이요, 내 몸은 쇠사슬로 여러 겹을 동여매고 한 사람씩 앞뒤에서 나를 결박한 쇠사슬 끝을 잡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후좌우로 나를 옹위하고 해주로 향하여 길을 재촉했다. 동네 20여 호가 일가이지마는 모두 겁을 내어 하나도 감히 문을 열고 내다보는 이가 없었다. 이웃 동네 강씨, 이씨네 사람들은 김창수가 동학을 한 죄로 저렇게 잡혀 간다고 수군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틀 만에 나는 해주옥에 갇힌 몸이 되었다. 어머니는 밥을 빌어다가 내 옥바라지를 하시고, 아버지는 영리청, 사령청 계방을 찾아 예전 낯으로 내 석방운동을 하셨으나, 사건이 워낙 중대한지라 아무 효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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